제65차 한국복음주의신학회 조직신학분과 자유발표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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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STKETS 작성일15-04-29 00:12 조회3,762회 댓글0건본문
"삼위 하나님의 교제로서 교회의 본질과 21세기 목회 모색"
유태화 (백석대 교수)
박해의 시기가 지나고 콘스탄틴 대제가 기독교를 로마의 공식 종교들 가운데 하나로 용인하면서, 동시에 스스로를 기독교인으로 내세우면서 기독교 제국이라는 이미지가 교회에 덧씌워지는 일이 일어난 이래로, 기독교는 항상 제도권의 모습을 유지하면서 성장과 쇠락과 부흥을 거듭해왔다고 할 수 있다.
교회는 정치와 경제와 사회와 문화의 저변을 파고들면서 자신의 세를 키웠고, 문자 그대로 크리스텐덤(Christendom)의 면모를 득하게 되었다.
프로테스탄트교회나 로마 가톨릭 교회나 이전에 크리스텐덤의 지위를 가지고 누렸던 모든 형태의 기득권을 내려놓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 빠지고 말았다.
매우 불행하게도 한국교회는 한국 사회 내에서 진정한 의미의 크리스텐덤을 미처 이루거나 혹은 맛보기도 못한 채, 정체기를 거쳐 이미 쇠락의 길에 들어서버리고 만 형국이 되었다. 한국교회가 전반적으로 성장 그 자체에 힘을 쏟았던 연유로 기독교적 세계관이 한국사회 깊숙이 그리고 포괄적으로 작동하도록 하는 일을 미처 시작하기도 전에, 이렇게 성장한 교회 내부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병리현상에 발목을 잡히고 말았기 때문이다.
한국사회 내에서 개신교회는 후기기독교(post-christendom)사회가 내보이는 특징적인 상황에 직면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은 분석들이 대두되고 있는 실정이기도 하다. 사회적 약자들과 행보를 같이 하고, 사회의 어두운 부분들을 걸머지고, 민족적인 비극을 품고 새로운 삶의 정황을 창조하기 위하여 애쓰며 일어섰던 초기 한국 교회의 모습은 사라지고, 기득권 세력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살아가는 형태에서 역겨움을 느끼게 하는 대상으로 전락해버렸다는 것이다. 이런 정황에 내몰린 교회는 프리크리스텐덤(pre-christendom)적인 세계관을 가지고는 현 사회를 직면하기에 너무 나이브하지 않은가 하는, 따라서 오히려 기독교의 부정적인 세속화가 깊숙하게 진행된 상황을 인정하고 그 바탕에서 새롭게 삶을 노정하는 것이 옳지 않겠느냐는 인식을 공유해야 한다는 것이다.
현상의 복잡성을 잠시 뒤로 미루어두고, 근원에로(ad fontes) 돌아가 그곳에서부터 다시 점검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시도가 유의미한 것은 특별히 “교회”라는 공동체는 아래로부터 형성된 다른 어떤 세속적 공동체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차원이 있기 때문이다. 교회는 위로부터 형성된 공동체라는 다른 어떤 공동체들과도 비교할 수 없는 독특한 지점을 확보하고 있기 때문에, 아래에서 형성되고 있는 문제 상황을 위로부터 파악하게 되면 의도치 않은 해법을 찾아낼 수도 있지 않을까 기대가 된다.
성경에서 발견하는 분명한 사실은 삼위 하나님 곧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무한한 사랑의 교제 가운데 계신 분이라는 점이다(요 1:1, 18; 17:11).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라는 말은, 세계교회협의회가 이야기하는 방식을 떠나서도, 사실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다시 왕이신 하나님 자신이 당신의 백성을 되무를 계획을 실행에 옮기시니 말이다.
그리스도인은 성령을 통한 그리스도 예수와의 연합(unio mystica cum Christo)을 통하여, 자신의 실존을 새롭게 노정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나님이 인간과의 깨어진 관계회복을 위하여 몸소 역사에로 개입해 들어온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십자가에서 성부 하나님께서 인류를 향하여 품은 의지가 실현되고, 성자 하나님의 성육신의 신비가 벗겨지며, 성령 하나님의 발원이 이루어지는 곳이기 때문에, 십자가 사건은 삼위 하나님이 계시된 계시의 자리라고 말할 수 있게 된다.
성령의 내주를 가진 인간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베풀어진 죄 용서와 나란히 죄의 심각성을 인식하며 동시에 전가된 의와 생명과 나란히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하는 지에 대한 깊은 인식을 갖게 된다. 인간의 죄를 속량하는 십자가 사건은 삼위 하나님의 내적인 교제 안에서 발생한 사건으로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교제적 본성을 가진 분임을 심층에서 보여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교회의 본질로써 성도의 교제가 갖는 네 가지 특징적인 국면이 있다.
첫째로 교회는 삼위 하나님과의 사귐을 경험하는 공동체라고 말할 수 있다. 근본적으로 교회의 본질적인 자리는 삼위 하나님의 인격과 사역에 놓인다. 단순한 인간적인 결사(Societas humana)에 근거한 공동체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런 근본적인 인식이 형성되어 그 바탕을 이루지 않는다면, 교회는 제대로 서서 기능할 수 없는, 방향성을 상실한 공동체가 되고 말 것이다.
둘째로 이런 맥락에서 교회의 본질의 또 다른 측면인 성도 상호간의 사귐을 언급할 수 있을 것이다. 삼위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교제가 이루어진 개인들이 서로서로 관계에 참여하는 차원이 약화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이런 차원의 교제는 예배를 통해서도 봉사를 통해서도 교육을 통해서도 선교를 통해서도 확보되어야 할 매우 핵심적인 가치이다. 이것을 조금 실천적인 언어로 바꾼다면, 성도 상호간의 교제가 확보되지 않는 공동체적인 규모는 이미 교회의 본질적인 차원을 상실한 공동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셋째로 본질로써 사귐 혹은 교제를 추구하는 교회의 지평은 단순히 성도 상호간의 “영적인 사귐”(societas in cordibus)에서만 머물러서는 곤란하며, 보다 더 적극적으로 회중의 실질적인 필요에 부응하는 방식으로 교제를 이루어야 한다. 특별히 도시적 삶의 구조 속에 현존하는 교회는 이런 차원에 대하여 매우 민감해야 한다. 이런 차원의 교제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자비”와 “정의”라는 두 근본 개념이 상호보완적으로 연결되어야 한다. 자비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당장 필요한 물품을 제공하는 것이라면, 정의의 사역은 장기적인 차원에서 직장을 새롭게 알선 한다든지, 일정 기간 거주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한다든지 하는 대책과 연관된다.
넷째로 교회의 본질로써 사귐을 말할 때, 이렇게 하나의 사귐을 이루는 교회는 또한 그 교회가 서 있는 지역사회와의 연대 혹은 사귐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교회의 사회적 책임은 단순히 복음을 전도하는데서만 찾게 된다면 지나치게 소극적인 태도로 복음을 이해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교회는 교회가 세워진 지역 사회의 영적이면서도 물질적인 필요에 민감할 필요가 있고, 긍휼사역을 구체적으로 실행에 옮겨야 한다. 이를 위해서도 교회는 “자비”와 “정의”라는 두 잣대를 균형 있게 견지해야 한다. 사회적 필요에 응답하는 유관단체들과의 긴밀한 연대를 확보하면서 지속적인 참여를 해야 하는데, 이것이 꼭 전도와 필연적으로 연관될 필요도 없다.
오늘날에도 목회가 필요한 것인가, 하는 질문에 대하여 이렇게 답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위에서 거론된 교제 가운데 계시는 삼위 하나님을 토대로 삼을 뿐만 아니라 네 가지로 정리된 교회의 본질로써 성도의 교제를 이룰 수 있는 교회를 목양하는 것, 그것을 지향하는 것이라면 오늘날에도 새로운 교회 형성으로서의 목회는 필요한 것이라고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최근에 분당에 소재한 우리교회는 향후 몇 년이 지나면 대형공동체를 유지하는데 필요한 건물을 팔고, 소형규모의 교회로 분립하겠다는 선언을 했다. 분당 우리교회의 이런 결정은 아주 바람직한 방향제시라고 생각된다.
상당한 숫자의 목회자들이 하이퍼 칼비니즘적인 생각을 갖고 있는 듯 하다. 동네에 교회가 개척이 되면 급한 이는 하나님 자신이고, 따라서 그분이 알아서 솎아내 보내 주겠지 하는 안일한 생각을 하는 경우가 없지 않은 듯 하다. 혹은 기도하는 일에만 매달리거나 혹은 앞으로 올 사람들을 위하여 세미나들을 열심히 참석하는 일에 내몰린 경우도 없지 않은 듯하다. 그러나 사실 이러한 태도는 목회의 기본에서 벗어난 일이다. 목회는 삼위 하나님이 자신에게서 멀리 떠난 사람들을 친히 찾아 나셨듯이, 목회자도 잃어버린 하나님의 양들을 찾아나서는 일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교회를 개척하려고 할 때, 초기 단계에서 조심스럽게 점검해야 하는 것은 자신이 가진 은사와 목회의 방향성과 상호관련성에 관한 것이다. 이제는 목회의 양상이 매우 다차원적으로 확장될 것이라고 짐작된다. 미래학자들의 연구를 세심히 살피면서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를 고민해보아야 한다.
앞에서 제시했던 목회적 방향을 내다보면서 궁극적으로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것은 “대안적 사회”(altera civitas)를 추구하는 것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대안적 사회는 결국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걸머진 공동체, 혹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십자가에서 드러낸 바로 그 삶의 핵심에 근거한 교제 공동체를 이루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가 싶다. 고난과 박해와 가난과 질병과 무시와 수치와 고통의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공동체적인 삶을 이루어 가는데서 자신의 삶의 정체를 파악하는 것, 바로 거기에 교회의 대안적 삶의 실체가 있는 것이다. 오늘의 삶의 정황은 어쩌면 지나친 부 혹은 부의 추구가 교회와 그 교회에 속한 지체들, 더 나아가서 교회와 세상을 분리시키고 상호 소외시키지 않는가 싶기도 하다. 과연 이런 삶의 정황에서 자본주의의 달콤한 약속을 뒤로하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공동체적인 삶을 살아갈 자로 자처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 논점을 구성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또 하나의 대형교회 혹은 하나의 새로운 부를 위한 몸부림으로써 목회는 더 이상 불필요하지 않을까 자문해본다. 오늘의 상황과 그 시대의 삶의 상황은 확실히 달라졌지만, 문제의 본질은 바뀌지 않았다는 사실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과연, 이런 공동체적인 삶을 목회자로서 솔선수범할 수 있는가 하는데 실존적인 관심사가 머물러야 하지 않을까 싶다.
2-3세기에 한 무명의 신자가 디오그네투스(Diognetus)에게 보낸 편지
“기독교인들은 자신들만의 도시에 살지 않고 특이한 형태의 말을 하지도 않으며 특이한 삶을 살지도 않기 때문에 국가, 언어, 혹은 그들이 지키는 관습에 의해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지 않는다. 그들의 행동방식은 학자의 사색이나 고민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어떤 사람들처럼 그들은 자신들을 순전히 인간적인 교리의 옹호자들로 선언하지 않는다. 하지만 야만인들의 도시뿐 아니라 그리스 도시에 살면서, 그리고 복장과 음식을 포함한 일상적 행동에 관해서 본토인들의 관습을 따르면서 그들은 우리에게 자신들의 놀랍고 충격적인 삶의 방식을 보여준다. 그들은 자신들의 나라에 살고 있지만, 단지 거류민으로 살고 있을 뿐이다. 시민으로서 그들은 다른 이들과 모든 것을 공유하지만 마치 외국인처럼 모든 것을 견딘다. 모든 외국이 그들에게는 모국과 같고, 그들이 태어난 땅은 이방인의 땅과 같다. 다른 모든 사람처럼, 그들도 결혼하고 자식을 낳는다. 하지만 그들은 자녀들을 파멸시키지 않는다. 그들은 식탁을 함께 사용하지만, 침대는 함께 사용하지 않는다. 그들은 육체 속에 있지만 육체를 추구하는 삶을 살지 않는다. 그들은 땅에서 일상을 살지만, 천국시민이다. 그들은 규정된 법을 지키고, 동시에 삶으로 그 법을 능가한다. 그들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모두에 의해 박해를 받는다. 그들은 무명이며 비난을 받는다. 그들은 모든 것이 부족하지만, 모든 것에서 부요하다. 정당화되고, 모욕을 당하지만, 축복을 누린다. 수치를 겪지만, 수치를 영예로 되갚는다. 그들은 선을 행하지만, 악행자로 처벌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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